2023. 2. 9. 01:25
PC 버전으로 접속하신 후 115% 이상으로 확대한 뒤 감상을 추천드립니다.
어느 정도 캐해가 어긋난 부분은... 애교로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곳에 들어 온 이상 그가 결백하더라도 모든 것이 변명이 되는 법이다.
마리 엑트리가 그랬던 것처럼, 바커스 셰헤라자데와 이사하야 코이치로가 그랬던 것처럼, 세이라 겟카가 그랬던 것처럼, 익시아 페모스와 유피테르 딜런이 그랬던 것처럼.
세어, 이제는 7번째의 변명.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류 아라타 학생.
아니지요, 재능을 개화할 가능성조차 애초에 없었던 사람이니, 이 아카데미의 학생으로 적절할까요?
그러니, 지금부터는 죄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나에게 더 이상의 발언권이 남아 있기는 한가? 특별 취급 받을 권리는 없지 않나. 하던 대로 하게, 리본. 지난 한 달 동안 늘 해 왔던 대로. 스스로 생각하여, 나에게 합당한 벌을 주도록."
지금까지의 일이 계획의 일부라 한다면, 지금부터의 일은 오로지 즉흥이다. 자신의 끝마저 틀에 박힌 꼴이 되지 않도록. 모든 대본은 직접 짜 내었지만, 이것만큼은. 그 곳에서 마지막을 맞으러 재판정으로 몸을 끌어 낸 이상. 더 이상 각본은 마련조차 할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죄인의 처형을 진행하기 전에,
직접 모두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까요?
"인사라니, 이미 전부 하고 들어 온 것 아닌가. 4년 동안 속여 온 것에 대한 사죄, 그리고 나의 욕심 탓에 목숨을 잃게 된 것에 대한 사죄. 결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내가 할 만큼은 했어."
무슨 말씀을, 죄인이 사죄를 할 대상은 겨우 스무 명의 파쿨타스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랍니다.
80억에 달하는 전 세계 사람이지요.
모두가 이 세계를 구원할 스무 명의 재능인이 배출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세상을 배신하고 절망에 빠트린 당신에게 합당한 벌은 역시,
이 아카데미의 선생인 리본은 그 권한으로서 모든 이의 상세한 프로필을 알고 있다. 조금 더 범위를 좁혀 말하자면, 약점을 알고 있다. 막후에서 리본을 조종했던 하류 아라타 또한, 특별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에 대한 약점도.
하류 아라타의 약점은 수많은 이의 시선, 그리고 어깨에 가해지는 무게. 이것을 상정마저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리고 하루 꼬박 본의 아니게 재판정에 갇혀 있느라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쏟아지는 고밀도의 시선에 한참을 구토했으리라.
한참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은 이내 정면을 향한다. 언제나와 같이, 빛이 완전히 꺼진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리본이 아니라, 벽면에 투영되는 수많은 눈이 아니라, 그 너머를.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정말, 가혹하군. 허나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마지막까지 진행하게. ... 어서."
물론이죠, 그러면 복기하도록 할까요? 죄인이 지금까지 벌여 온 죄가 무엇인지.
당신에게 말려 든 스무 명의, 그림자들과 함께요.
탐욕 속에 추락한 가치에 대하여
"이게 복기인가 보군. 리본도 꽤나 고생을 했겠어. 이런 식으로 클론 스물을 만들었겠군. 스무 명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그렇게 되겠네요. 리본도 참, 이상한 짓을 벌인다니까요.
저를 위해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라타를 위해서는 이렇게 잔뜩 준비하다니.
계단 저 위에서 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도로시 디어벨라의 클론을, 비스듬히 올려다본다. 분명 정면을 향한 시선도 거두지 않는데. 한순간에 눈 앞에 생겨난 구조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계단 아래에도 난간에 기대어 있는 클론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는다.
"너희 둘은... 조금은 특이했지. 리본이, 정확하게는 내가. 판을 깔아주지도 않았는데 죽은 것이라. 아무리 계산 하에 두려고 했어도 사람 마음은 계산되지 않음을 느꼈네. 아이미 프라니아, 다시금 묻겠다만. 억울한가?"
음~ 잘 모르겠네요. 진짜 억울하긴 한데, 그 표정 보니까 억울해하면 안 될 것 같고.
사람이랑 마주할 일이 많아서 표정은 조금 읽거든요. 무표정 같지만, 평소보다 조금 슬퍼 보이는 것도 같고. 기분 탓인가?
"그래, 기분 탓이겠지. 내가 슬퍼할 이유가 어디 있나. 일이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라 생각할 뿐이네."
모카미 모카의 배신에 슬퍼했던가?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했던가? 하류 아라타는 자문하고,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아니라는 답을 낸다. 슬퍼할 정신이란 게 존재했다면 이런 일을 벌일까. 필요 이상의 애도가 필시 따라붙는 이런 일을.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답하리라.
그건 그렇고, 아라타도 참 욕심쟁이에요. 저 이상일지도 모르겠는걸.
목표한 것 하나를 손에 쥐기 위해서 세상을 등질 각오를 했잖아요. 미리 털어놨으면... 어쩌면 말이 잘 통하는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랐겠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진심을 말하게, 겉치레 대신. 겉치레로만 대하기엔 6년 동안 지낸 시간은 길지. 아니 그런가?"
글쎄요? 그렇다기엔 본인을 못 본지 꽤나 오래 되어서. 그리고 진심으로 대했다면 직접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 말은 뼈 아프군."
왜 가짜를 내보냈을까. 본인이 양 쪽 모두를 관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외의 이유도 분명 있다. 아이미 프라니아의 클론이 표정에 생긴 균열을 포착했는지 느릿하게 입을 연다.
혹시, 직접 만나서 얼굴을 본다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가짜를 내세웠다거나.
"......"
왜 말이 없는 건지. 설마, 돌이켜 보니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한 거에요? ... 세상에.
"약한 사람이니. 슬퍼하지 않겠다고 각오했던 게 한 숨에 무너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만일 눈 먼 칼에 내가 죽으면? 계획은 자연스럽게 부서질 테지."
변명이네요.
"그럼, 변명이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질책인지 아닌지. 굳이 따지지 않는 어조의 말임에도 고개 살짝 젓고는 제법 쓴 맛을 입에 품고 웃는다. 계단 위쪽, 도로시 디어벨라의 클론 옆의 벽에서 삐져 나온 창을 보았기 때문에.
"복기에는 이것도 포함되나. "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리본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죠?
아이미 프라니아의 클론의 말에 박자라도 맞추듯 두꺼운 창이 쇄도한다. 왼쪽 어깨를 깎아내듯이. 움푹 파인 어깨에서 터져나오는 피를 남은 한 손으로 막으며 하류 아라타는 깨닫는다. 근 한 달 간, 세상을 향해 보여줄 것을 만드느라고 재능인들을 마모시킨 만큼, 하류 아라타 또한 이 처형 과정에서 깎여 나갈 것이라고.
그러니까 결코 한 번에 끝나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다고.
이건 진심? 거짓? -즐겼으면 그만이잖아, 갸루니까!-
"굳이 이 상태의 클론을 여기까지 가져 온 이유는 무엇인가?"
빛이 꺼지고, 다시 켜진 다음. 바로 하류 아라타가 내뱉은 말이다.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시야를 정돈하고자 몇 번이고 눈을 껌벅여야 간신히 보이는 것이, 창을 잔뜩 맞은 클론이기 때문에.
"죽이려 들었을 때의 마음을 떠올려 보라고?"
음~ 그것도 있지요.
그것보다는 죄인이 지금까지 한 실수들을 돌이켜보는 자리라는 게 적합하겠지만요.
복기라는 건 원래 그런 뜻 아닌가요?
설마, 지금까지의 행동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복기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죠?
"하, 하하, 하하하... 그렇군. 내가 너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었으니, 나는 여기서 묵묵히 끝까지 받아내는 것이 합당하고 온당해. 그러니... 마음대로 하게."
뱀처럼 기어 온 사슬은 바지 밑단에 달린 사슬에 연결되고, 하류 아라타의 발등과 발목과 정강이까지 옭아매어. 이윽고 선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든다. 눈을 아래로 돌리지 않고, 피를 닮은 색의 오일로 뒤범벅이 된 클론을 본 하류 아라타는 이 모든 상황이 끝나서야 본인의 구속을 인지하였으나,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게 되었으면 이것이 처형이겠는가.
클론을 한 번 밖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거짓말임은 죄인이 누구보다 잘 알 테고요
4년 동안이나 지하실 바깥으로 한 걸음도 걸어나오지 않은 채 클론에 대해서, 이 아카데미에 대해서 연구했으니까.
그러나 이번만은, 땜질로 가져 온 거에요.
급조할 수 없었으니까요. 죄인이 지하실에서 일을 벌인 바람에, 기계실은 작동을 멈췄답니다.
"그렇다면 네가 말했던 그림자들은 모카미 모카를 제외한 열 아홉 명의 클론이 되겠군 그래. ... 설정은 해 두지 않았지만, 지금 재판정까지의 일 정도는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게 낫겠어."
모두 정답입니다. 그렇게 잘 돌아가는 머리로 왜 그렇게 구멍투성이 일을 벌였을까 의문이네요.
조력자를 구하는 대신에 클론을 여럿 만들거나 AI에게 일을 맡길 수도 있었는데.
세계가 궁금해하는 질문이에요. 왜 굳이 사람을 썼는가.
리본의 추궁 닮은 질문에 하류 아라타는 가볍게 웃는다.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리고 주저앉은 채 생각보다 더욱 죽은 눈을 하고 있었던 모카미 모카의 앞에 서 가만 내려다보던 그 4년 전부터 지금까지. 잊을 법하면, 떠오르는 질문이기에.
그렇기에, 그 질문의 답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재능인이 아니더라도, 아무리 범재라 하더라도. 4년 동안 답안 하나를 갈고 닦을 능력은 있으니.
"마저 하게. 뒤에 더 붙을 말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배려인가요? 으음... 뭐.
조력자를 잘못 구하다 실패한 건이 이미 있고─세상 사람들은 바커스 셰헤라자데가 로펜 가르시아를 택했던 걸 먼저 알았을 테니까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변덕에 가득 차서 하지 않던 일을 하는데.
왜, 굳이.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했는가.
알고 범했죠?
하류 아라타는 눈 앞의 클론을 바라본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신을 도왔던 사람의 모습을 본딴 클론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를. 그들은 무서울 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다. 쇠사슬의 무게에 떨리는 다리가 만들어내는 절그럭 소리 외에는, 그리고 하류 아라타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끝까지 시킨다면 입을 다물 권리도 없겠지. 그래, 배신당할 것도 염두에 두었지. 사람의 정신은 약하지 않나, 내가 . 그런데도 왜 굳이 조력자로 사람을 구했냐고 묻느냐면..."
눈동자는 그 시선으로 말을 한다. 어서, 어서 말해 봐 이 빌어먹을 새끼야. 우리의 희망을 지워버린 개자식아.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아, 천장 보고 눈을 아예 감아버린다. 그렇게 차단하더라도 피부에 닿는 시선은 따가워서, 아프다.
"이해자를 구하고 싶었어. 그러나 이 사이클을 부숴 버릴 생각을 진심으로 하는 사람은 아마 없었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렇다면 작은 속살거림에 넘어갈 사람을 구할 생각이었네. 그리고 모카미 모카가 가장 적격이었고. 자유의지가 아예 없는 사람은 곤란해. 개성이 너무 강한 사람도 곤란하지. 그렇다면 앞길이 완전히 안개 속인 사람은 어떨까. 당장 내일 할 일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따르지 않았을까. 내가, 비록 흐릿하더라도 길을 만들어 준다면."
이해자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구했지만, 그 이후로 모카미 모카를 믿어 본 적은 없다. 결국 데려 온 사람은 재능인이었으며, 그 속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능인 제도를 부수겠다는 열망이 없었으니.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상황이 오면 유감 없이 내칠 작정으로 계획을 짜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감춤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남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일은 남에게 실마리라도 보게 하지 않았다. 진심은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감춰 두었다. 그것을 모조리 떠올린 하류 아라타는, 허탈하게 고개 저으며 웃는다.
"그러니 배신당해도 싸군. 배신할 각오로 일을 벌였으니. ... 지금쯤 저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두 숨 죽인 채로 죄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대답이 되었나요?
"알려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만... 알려줘서 감사하네."
오전 3시에는 모두가 네버랜드로 갈 시간
걸을 수는 없지만, 뒤로 한 걸음 걷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뒤 제자리를 반 바퀴 돈다고.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일변하리라.
다리가 묶여 있다면, 그럼에도 보이는 것이 일변한다면 본인이 아니라 주변이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리라. 하류 아라타는 빙빙 도는 세계 안쪽에서, 아직도 도는 시야 안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리스가와 리온의 클론을 겨우 발견한다.
"정말 오랜만이로군. 네 기억에도 진짜 하류 아라타는 오랜만일 테지. 불만족스러운가?"
어느 면에 대해서 불만족스럽냐고 묻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네, 무척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내 반항도, 내 죽음도 결국 당신 손 안에서 놀아난 꼴이었으니까요!
으르렁거리는 아리스가와 리온의 모습을 보고, 하류 아라타는 가만 서서 팔짱을 끼다, 손 안에서 놀아났다는 말을 듣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한참을.
"내 동기는 딱히 사람을 가리지 않았어. 모카미 모카에게 동기를 받았을 때 최종 확정은 내가 했네. 누군가 하나만을 자극할 법한 동기는, 물꼬를 틀 첫 번째 말고는 뿌리지 않기로 다짐했고. 흔들린 것은 생전의 아리스가와 리온이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착각하지 말게, 아리스가와 리온─의 클론. 여기서 내가 할 거짓말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나? 이 상황에서까지?"
다시, 허탈한 웃음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다가 멎는다. 아리스가와 리온의 클론이. 그리고 아리스가와 리온 본인 또한, 아마도. 듣고 싶은 말은 모든 진실의 교집합 내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자멸한 것이 너야. 그리고 누군가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것도 너네. 더 할 말은 없어. 지옥에서나 자세한 것 물어보게. 아마도 내 두 번째 클론은 준비되지도 않은 듯 하니."
그, 입. 거슬렸습니다... 지금도 거슬린다고. ... ...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던 아리스가와 리온의 클론은 생전에 에이레네 얀 드 살바도르에게 했던 것처럼, 칼을 빼어들고 달려든다. 하류 아라타는 몸을 틀어 피할 생각조차 않는다. 그야, 이 원망마저 처형의 일환이니까.
이번에는 저지할 세이라 겟카도 없다. 그렇기에 첫 번째 검격은 왼쪽 옆구리를 찢는다. 휘청이면서도, 이대로 목에 검격이 들어오나. 간신히 버티고 서서 칼의 움직임을 관찰하지만. 그것은 익시아 페모스의 클론에게 저지당한다.
죽이려고까지 들지 마라, 내가 할 일을 빼앗지 말라고.
리본이 죄인이라고까지 못박지 않았나. 죄인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데 걸맞은 건 처형인이야.
"그래, 물론 그렇겠지. 그러나 네 몫은 오지 않을 것 같군. 복기는 반의 반도 진행되지 않았어."
그런 걸 내가 신경써야 할 이유는 없지. 옭아맬 것 또한 없거든. ... 쳇, 날붙이를 가져 왔어야 하는 건데.
빌려 주나, 아리스가와 리온?
빌려 줄 것 같습니까, 내가?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는데!
"말하지 않았나. 복기는 진행 중이라고. 목숨은 붙여 줘야 다른 이들이 기뻐할 것 같군."
그래. 그는 여기서 죽지 않아야 해. 그러니 죽일 생각은 접어 주겠니? 정말로 여기서 죽여버리려 든다면, 리본이 막을 거야.
"제지 고마워, 헤카테 아트로포스. 덕분에 지금 당장 죽지 않아도 되어서 한 시름 덜었네."
그렇게 말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들으니까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네.
팔짱을 끼고 저만치에서 바라보는 헤카테 아트로포스의 클론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가, 하류 아라타는 미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네 번째 살인사건에 대한 능력평가 중 느꼈던 기시감도, 첫 번째 살인사건에 대한 능력평가 중 느꼈던 기시감도 아니다. 그저,
"너는 거의 모든 것을 알았을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방관자로 남겠다 하는군. 이 정도는 예지했을 거야. 안 그런가?"
물론. 그리고 만약에 예지한 것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가차없이 죽였을 테지. 아니야?
그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내가 입을 다문 거야.
"그렇지. 순간의 발언이 나를 무너트렸을 테니 그 뿌리를 뽑았겠지. 내가 했을지도 모르는 행동이 나를 구한다라... 흥미롭군. 예언 하나 부탁해도 되겠나?"
만약 너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면... 이미 너도 답을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설령 모르고 있다 해도, 난 네게 예언하고 싶지는 않아.
"그런가. 그냥 던진 말이니, 그렇게 신경쓰지 말게."
매몰찬 말에 고개 끄덕인다. 아무리 차갑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감히 요구할 자격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 오지 않기에.
처형장 구석에서,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않고 물끄럼 바라보는 유피테르 딜런의 클론에 눈을 돌린다. 만들어 놓을지 말지를 끝까지 고심했던 클론이기도 하다.
"행운이라, 죽음이 빗겨 갈 것을 알았거든. 그리고 쓸데없는 살인과 관계되지 않을 성격임도."
고평가는 고맙지만. 상황이 이래서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걸.
더 평화로울 때 해 줬으면 곧이곧대로 들었을 텐데!
"그 때 하는 말은 내가 아니라 클론이 하는 것일 테니. 그러니 고평가로 들어도 좋아. 이것은 네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저 위의 본인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네."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같은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그는 유피테르 딜런의 클론을 마주본다. 옆구리에서 바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질척한 핏방울의 감촉을 느끼면서.
"여전히 생명은 전부 존귀하다고 생각하나? 여기서 유일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죄인을 마주보고도."
여전히. 내가 클론이 아니었다면 너를 데리고 나갔을 텐데, 하고 생각이 들 만큼이나.
아마도, 가능했다면 처형장 문을 두드리고 있었을걸. 꺼내 달라고 말이야. 아, 우선 그 발의 사슬부터 어떻게 했을지도.
"그렇기 때문에 전원을 포섭하려고 들지 않았던 거야. ... 흐음. 책임을 진짜 유피테르 딜런에게 돌리는 것 같은 말이로군.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해 주게."
다시 한 번, 불이 꺼진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더라.
차려진 것은 티 타임 세트. 그 때 정원에서 본 것과 한 치의 오차 없다.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일변하는 풍경은 영 적응이 되지 않는가 하류 아라타가 고개를 흔들자, 에이레네 얀 드 살바도르의 클론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탁, 탁. 하고 두들긴다.
앉아요, 무재능. 이야기가 많이 길어질 것 같은데.
"길어진다면 다른 그림자들이 나를 가만 놔두겠나? 그리고 오래 이야기할 생각도 없네. 모든 이와 3분만 이야기를 나눠도 한 시간이야."
아쉽네. 호의를 보낼 사람은 몇 없다는 거 알면서 이러는군요. 그럼 간단하게 한 잔 들면서 질문에 답이나 해 주세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장담하지.
찻잔에 조용히 쌓여가는 녹색 찻물을 바라보며 하류 아라타는 가만히 팔짱을 낀다. 그대로 입을 닫는 것으로 거절도 동의도 아닌 신호를 보내자, 에이레네의 클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만들어내곤 조용히 입을 연다.
어땠나요? 충실하지 않은 도구를 쓰다 보기 좋게 배신당한 소감은.
"... 말은 바로 하지. 난 도구를 쓰지 않았어."
거스른 순간 제거할 각오를 먹었다는 것은 도구로 생각하고 있단 증거입니다, 무재능.
대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본다면 그렇게 냉정해지지는 않았겠지요. 틀립니까?
하류 아라타는, 4년 동안 그 행세를 하던 기계 덩어리가 아니라 정말 피와 살이 흐르는 하류 아라타는 가만히 입을 닫는다. 머릿속을 지나다니는 생각들 속에서 올바른 단어를 고르기 위한 침묵이 아닌, 단순이 말문이 막혔기 때문에 흐르는 침묵.
그렇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을 깨는 것은 뒤통수를 거세게 짓누르는 한 사람의 손. 가까스로 고개를 틀지만 그것이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히지 않게끔 하지는 않는다.
말하십시오.
"이렇게 윽박지른다고 없는 말이 나오지는 않아."
아니오. 나옵니다, 이 곳의 유일한 인간 나리. 고문은 취미가 아니지만. 어깨뼈를 부러트린다면 불기 마련이지요.
어차피 죽는 것은 확정, 한두 군데 부러트린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엄포는 아니다. 세이라 겟카─혹은 제로. 어느 쪽이든─의 클론은 생전의 힘을 그대로 반영하였으니. 손아귀 힘만으로 뼈를 부러트리지는 못하더라도 주먹. 혹은 손날. 인간의 연약한 뼈를 부수기에는 충분한 물리력이었으니. 실제로 그 클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 없이, 하류 아라타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지만이 중요하다.
충격에 엎어진 찻잔에서 아직 채 식지도 않은 찻물이 흘러나와 얼굴에 얕게나마 화상을 입힌다. 고개를 들려고 애를 써도 그 막대한 물리력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억눌린 채 짧은 웃음을 흘려보낸다.
"... 멈추라고 말해도 듣지 않겠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지금의 나리께는 굽힐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할 이유 또한.
정녕 어디 한 번 부러져 봐야 입을 여십니까?
"잠시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나 주게, 정 답을 듣고 싶다면. 어깨의 그 손부터 떼고. ... 정말 부러트릴 생각이 아니라면."
... 아니요, 세이라 님... 리베스 님의 말을 듣지 말아 주세요...
당장이라도 꺼져 버릴 듯한 목소리는 그렇기에 이 처형장 안을 더욱 힘 있게 메운다. 요네사키 카라의 클론은, 여리기에 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고는 더 이상 떨더라도 외면하지 않으며 정면을 바라본다. 떨더라도 피하지 않으며.
믿었어요... 카라는, 리베스 님을 믿었어요. 그런데도, 이런...
"일단 네게 그 말을 한 건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상황 정도는 추론할 수 있어. 내 기억과 사고 방식을 지닌 클론은 이렇게 말했겠지. '나를 믿지 말게. 난 그럴 가치가 안 되는 사람이야.' 라고... 아닌가?"
... 그랬, 었죠... 네, 리베스 님은 그랬었죠. 그래서 그 말도 안 믿었어요.
그게 카라의 욕심인 건 알지만...
"그랬겠지. 너는 누군가를 믿어야만,"
자, 그만그만! 잘못하지도 않은 카라를 이렇게 몰아가야겠어?
카라도 말이야, 쓸데없는 말에 전부 대꾸해 줄 필요는 없다구~~!
잘리듯이 끊긴 말. 무겁고, 가라앉으며, 질척한 이 처형장의 분위기를 그나마 끌어올려주는 이의, 클론. 모가미 나오토의 클론이 눈 앞에 자리한다. 집게손가락을 들어 하류 아라타의 눈 근처에 가져다 대며.
나 참~ 다들 한 마디씩 말하는 타이밍에 나도 불러줬어야지, 하고 싶었던 말이 없진 않았거든.
이해하지 아라타? 이해 못 해도 별 수 없지만.
으음... 생각보다 준비한 말은 많았는데! 막상 마주치니까 머리가 비어 버린단 말이야.
"빨리 부탁하네. 시간이 촉박한 건... 알고 있잖나."
앗, 그랬지 그랬지. 그러면... 으, 역시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네. 이미 한 질문을 다시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모카를, 도구로 쓴 거야?
"돌고 돌아 그 질문인가."
사람을 도구로 쓴 건 저와 당신이 유이합니다. 그래서 대답을 듣고 싶을 뿐인데. 회피한다면야.
"도구로 썼다라... 생각을 좀 이어야겠군. 아니라고 말해 봤자 아니 들어 줄 테니, 조금은 좋은 변명을 생각할 시간을 주게."
하류 아라타는, 여전히 티 테이블에 머리가 처박힌 채로. 한껏 제압당한 채로 생각한다. 과연 4년 전 품었던 한 각오는 모카미 모카를 배신할 각오일까. 아니면 모카미 모카를 도구처럼 사용하다 적당할 때 버릴 각오일까.
지금 이 처형도 기실은 계산범위 안쪽에 들어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처형장에 발을 들일 시간이 보름쯤 더 빨랐을 뿐이지.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도 도구로 삼은 것일까. 나쁜 버릇은 고치기 힘들어 먼 곳으로 생각이 튀는 것도 얼마간.
"어쩌면. 재능인 제도를 이런 방식으로 부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도구로 사용했을지도 모르겠어. 스무 명의 재능인들, 이 아카데미의 건물 구조, 그리고 나 자신의 생명까지. ... 이것으로 만족하는가."
총체적 난국 죽음의 실험 파티
머리를 테이블 위에 짓누르던 물리력이 가시고도 일 분 정도가 지나고서야 하류 아라타는 고개를 든다.
바뀐 시야. 우선적으로 보이는 것은 무색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 다만 라벨이 하나 붙은 것이, 그리고 그 라벨에 새겨진 것이 만국 공통의 기호인 해골 문양이라는 것이 특이점.
"눈 앞의 독약이라. 어지러웠지. 여러 모로. 여섯 명이 얽힐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 그래, 그것 말고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지. 리 이셴, 불 좀 빌리지."
하하, 재미있네~. 이걸 이 때까지 가지고 있어 준 거야? 대단하셔라. 누굴 통해서 받아 왔을까나, 궁금하긴 한데 그걸 물을 타이밍은 아니지 아마?
여하튼, 그래. 네가 정 원한다면 못 빌려 줄 것도 없지. 대신에 하나만 물을게.
담배를 빼앗듯 받아 간 리 이셴의 클론이 낄낄댄다. 과연 이것은 원본이 과학자의 숨통을 끊을 때 사용한 약과 조성이 같을까. 담배에 스며드는 그 투명한 액체를 바라보며, 자기 홀로 생각을 전개시켜 나간다.
재미있었어? 나는 꽤 재미있었거든. 네 장난이 말이지.
"그다지. 무게를 감당하는 삶은 내게 전혀 걸맞지 않아. 기대의 무게이건, 절망의 무대이건."
재미있는걸, 그 대답마저도. 그러니, 보답으로 친구에게 마지막 온정을 줄게, 해독제야. 정 힘들 때 원샷, 알지?
리 이셴의 클론이 라이터를 든다, 이내 불이 연초의 끄트머리에 이르자 옅은 보라색 연기가 천천히 공기 중에서 춤을 춘다. 입가에 필터를 가져다 대고, 연기를 폐 속으로 밀어넣으면 느껴지는 것은 진하디 진한 불쾌감. 처형이므로, 이것이 독이 아니라는 식의 반전은 없다.
붉은 색의 약병이 테이블 위에 놓이지만 하류 아라타는 그것을 집어가지 않는다. 리 이셴의 클론을 끝까지 믿지 않는 것 절반, 설령 진정한 온정이라도 그걸 받아들일 자격은 이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절반. 독연이 폐를 채워갈 때 즈음, 어깨에 찌르듯 뜨거운 느낌이 퍼진다.
"바커스 셰헤라자데. 그 때 실험은 끝난 것 아니었나? 죽음 끝에 아무 것도 없음은 깨달았을 텐데. 질리지도 않았나 보군, 실험 대상을 나로 바꿔서 한 번 더 할 심산인가?"
실험과도, 질린 것과도 영 별개라네, 하류 군. 나는 누구의 손바닥에 올라가는 것은 영 내키지 않거든.
그런데 이 몸까지 실험체로 삼아서 이렇게 장대하게 벌여 주다니, 기분이 상하지 않겠나.
"실험체라기보다는 장기말에 가까웠지. 다만 그 말을 기꺼이 사용한 것은 아니야. 믿어 줬으면 하네. ... 말 더하자면. 불구덩이로 걸어들어간 건 네 선택 아니었나."
... 쯧, 변명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지금까지 좋을 대로 사용하여 왔으니 지금부터는 잠시간만이라도 이용당해 주게.
하류 군은 최후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
고개만 반의 반 바퀴를 돌려 옆에 선 사람을 바라본다.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두 개의 메스가 더 들려 있다. 그것도 머지 않아 본인의 몸에 박히겠지.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를 꺼내어, 주저앉는다. 어깨죽지에 꽃힌 메스는 등받이에 걸려 살덩어리를 찢으며 빠지고, 하류 아라타의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그걸 놓칠세라, 바커스 셰헤라자데의 클론이 메스를 던지듯 꽂아넣는다.
퍼져 오는 격통 속에서, 인기척을 감지하고는 뒤로 고개를 돌린다. 큰 키, 눈을 덮는 검은 머리카락... 분위기, 혹은 인상이 닮은 사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사람 로펜 가르시아의 클론.
"여전히 너는 지켜보기만 하는군, 구원을 바라지는 않았다지만. 그래도 가만 서서 한 마디도 안 할 줄은 몰랐네."
제가 손을 댈 자격은 없으니까요. 말을 덧붙일 자격 또한.
제가 한 것은 지켜 본 것 뿐이고, 할 말은 다른 분들이 전부 대신하여 주겠지요. 그 때처럼...
안 그렇습니까?
"그래, 틀린 말이 아니야. 다행이군, 아무래도 몸이 너덜너덜한 상태라 말이야. 잘못한 게 많아 끝까지 버티려고 했다만."
... 마지막 가는 길, 그래도 마음은 편하면 좋을 테니. 기도라도 해 드릴까요.
"어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나."
그리 오해하시니 섭섭합니다, 하류 아라타 님. 방금 그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거든요...
손 안에 든 약병을, 손바닥 위에서 굴린다. 이것이 약이라면, 안개가 가득 낀 머릿속을 조금 명료하게 바꿔 줄 것이다. 리 이셴의 클론마저도 재미를 추구하였다면, 그리하여 이것이 독이라면, 더 이상 처형을 진행시키지 않고 여기에서 끝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편해지는 것은 변함 없을 테니, 하류 아라타는. 부상으로 인한 격통과 실혈로 마음이 약해져...
해독약을 마신다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곤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기 혼자 편해지려고 하면 말이지요!
그래서 훔쳐 뒀습니다, 어때요, 잘 한 짓 아닙니까? 이야~ 제 재능은 그 때나 지금이나 절묘할 때 빛을 발합니다?
마법이라도 부린 양,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약병이 린 신루의 클론 손바닥 위에 올라 가 있었으므로.
편해질 자격은, 음. 지금의 하류 씨에게는 부족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남들은 편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 쉬지 않고 압박해 왔으면서 본인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겠다니!
"... 하하, 그래. 나를 위한 처형을 받겠답시고 여기 들어와서, 물리적으로 발목이 묶여버렸을 때 체념을 했어야 하는 것을."
그럼요 그럼요. 납득했으면, 이제 이건 버립니다?
"마음대로 하게. 다시금 실감하는군, 나에게는 어제 오후 열 시 정각부터 그 아무런 선택지도 없었는데."
채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던져진 약병은 산산이 흩어져, 테이블 건너편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다른 클론의 발치를 적신다. 그 누구보다도 난폭한 자의 클론. 그러나 각오와는 달리, 행동은 조용하였다.
"네 속내는 읽기 어려운 편이었어. 모든 것을 흥미본위로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뭇 진지했지. 리 이셴이나 바커스 셰헤라자데는 속내가 새까만 색이라 위험하다, 는 쪽으로는 적어도 일관되었다만."
얼씨구, 읽기 어렵긴 뭐가 읽기 어려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것도 못 읽는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만.
이런 모습 보기 전까지는 몇 대 갈기고 싶었는데,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에이, 관둘란다. 괜히 손에 피만 잔뜩 묻지.
"네 마음 가는 대로 하게. 약한 놈이라고 봐 줄 생각 하지 말고."
헛소리하네. 방금 그게 내 마음이야, 이 자식아. 당장이라도 픽, 뒤질 것 같은 얼굴 하면서 지껄이긴.
맨 처음으로 만나는 게 나였어야 했어. 그러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 패 줄 수 있었는데.
"그런가, 고맙군. 맞아죽지 않게 해 줘서. ... 너는, 할 말이 있으면 하게. 그 때 이후로 말수가 줄어서는."
무엇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리를 땅바닥에 박아 버린 사슬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두 개의 검집이 부딪히는 소리. 서로 대척점에 선 두 개의 재능을 달고 있는 사람.
"구원은 없나 보군. 내심 기대했었는데. 들쳐업고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야."
너를 죽이는 건 여기 있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리고 이제 히어로라고 하기에도 어색하니까.
네가 정말 맞아 죽을 것 같으면, 그 때는 막으려고 했어. 그래도 지금은 그럴 것 같지가 않네.
"납득 가는 사유로군 그래. ... 하고픈 말이라도 있나? 없지는 않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아마 마지막일 듯 한데. "
하고 싶은 말이라... 누구 어깨에 짐을 올려놓고 싶지 않아서 벌였으면서,
혼자서는 정말 많은 것을 짊어졌구나. 모순적이네.
"원래 양 면이 있는 것이 사람 아니겠나. 그리고 남들에게 말 못할 일을 벌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지는 게 많아지는 법이고."
... 응, 틀린 말이 아니야. 그리고 그 무게는 본인이 감당해야지.
"그래, 네 말대로. 감당해 내야지. 이런 형태로나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말이 끊기고, 다시 암전, 그리고 명전. 눈 앞이 밝아지면 장소 역시 변한다. 이 짓도 이제 다섯이라, 익숙해질 때가 온 듯, 하류 아라타는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리고 갑자기 올려붙이는 따귀에도, 마치 상정했던 것마냥.
"너는 그런 행동을 할 자격이 있어. 별 거 아닌 동기로 살인을 종용하고, 그것이 실제 살인으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살인에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했거든, 마리 엑트리. 그리고 실제로 그랬지."
결국 노리고 했다는 이야기네, 정말이지 구역질이 나. 어떻게 그러고도 아무 변화 없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너는 몇 번이고 자주 잊는군. 하류 아라타의 취미도 그 사이 잊더니, 클론과 본인 둘이 행동했다는 것도 잊나? ... 아, 실례했군. 없는 정보를 알 리가 없어, 여기의 너와 재판정의 너는 동일한 클론이 아니었지."
거 봐, 자기도 똑같이 잊는 주제에, 남의 손을 빌렸다지만 누구보다 살인을 많이 했던 주제에, 감히!
"그런 주제에, 답지 않게 고고한 척 해서 미안하군. 그래도 이해하게, 나는 평생을 이런 꼴로 살아가야만 했어.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니 이런 방식 외를 모르네."
하류 아라타는, 전 초세계급 정치인 하류 야스타카와 전 총리대신 하류 시게지로를 부친과 조부로 둔 사람이다. 열 두 살, 이 아카데미에 발을 들이기 전. 열 살, 하류 야스타카가 초세계급이라는 이름표를 박달당하기도 전. 겨우 걸음을 떼고, 단어를 말할 수 있을 때부터. 재능인이 되기 위한 수업을, 정치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실은 그저 머리회전만 빨랐을 뿐인 범재였음에도.
천재를 만들기 위한 교육은 범재를 수재로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가, 당신의 가족은 진심으로 파쿨타스 아카데미의 학생 자리를 노리고 하류 씨를 몰아붙였죠... 리본이 알려 주었어요.
"그것이 이 일을 벌인 계기가 되었고. ... 허나 남의 비밀과 가정사를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군, 세리 세이. 하기야 비밀로 둘 생각도 딱히 없기는 하였다만. 내가 죽고 나면 진짜 재능 있는 기자들이 네가 말한 내용을 전 세계에 퍼트리겠지."
네, 분명 그러겠지요... 지금까지 숨긴 게 의미가 없게 될 거에요.
"정말 아쉽게 말이야. ... 아니지, 발각을 전제로 벌인 일이었으니 언젠가는 밝혀졌을 일인가?"
주머니 속, 산산조각이 난 카메라에 손을 뻗는다. 날카롭게 찢어진 알루미늄과 깨진 유리가 손을 마구 찌르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치명상이 거듭되어 온 탓에, 그 정도의 자잘한 부상은 안중에도 둘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서 있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이다. 매콤한 독 연기에 마비된 신경은 뇌를 향하여 고통을 전달하기를 포기한 지 오래이다.
"그리하여, 나를 원망하는가?"
네. 죽음은 바라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놀아나면서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당연하지, 너 때문에 내 몸은 갈가리 찢겼어! 그 십 분의 일이라도 느끼게 하고 싶은걸?
단 1초의 간극도 두지 않고 터져나오는 원망들, 그리고 복부를 있는 힘껏 찌르는 칼날.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오른손이다. 그리고 힘을 주어 베어 가르듯이. 위장을 따라서 역류한 피는 입을 가득 채우고, 땅바닥으로 흐른다.
인간의 육체란 쓸데없이 강인하여, 메스라고 하더라도 손잡이까지 박힌 상태로는 찢어지지 않는다. 안쪽은 박살이 날지라도. 이에 비해 정신은 얼마나 약한가.
"원망받을 짓을 했지... 이 정도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만, 이제 보내 줄 수 있나. 아직 뒤가 남은 것 같으니."
마음만 같아서는 내가 당한 그대로 돌려 주고 싶지만, 그러면 죽어 버릴 거잖아.
아직 한 분, 더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요... 보내 드리는 게 낫겠네요.
새하얀 시작의 페이지 위에서 오만한 나비는 날아오르기를 갈망한다.
"쓸데없는 배려 감사하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사라지는 불빛. 눈 앞에 서 있는 것은 한 사람 뿐.
마시로 아게하의 클론을 향해 그는 피로 잔뜩 얼룩진 상체를 살짝, 의자에 앉은 채로 기울인다.
"그러고 보니, 리본에게 처음 반항하던 사람은 너였지. 반항아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너는 아니었어. 차분히 되돌아 보니 어긋난 게 참 많군. 리본이 복기하라고 한 이유를 알겠어."
네가 읽지 못한 거겠지, 어긋난 게 아니라. 나는, 슬럼프에 빠지고 파쿠르를 찾기 전부터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었어. 알잖아?
"그럼에도 협박에는 굴할 줄 알았지. 하기사 내가 사람 속을 어찌 알겠나. 그 어떤 재능도 없는 일반인이. 그것도 재능인의 속을."
한껏 다친 사람이 내뱉는 작은 웃음이 퍼진다. 마시로 아게하의 클론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만을 낀 채 하류 아라타를 응시한다. 그 힘 빠진 웃음이 정적으로 바뀔 때 쯤, 이번에는 클론 쪽에서 먼저 입을 연다.
왜 그랬어?
"저 위에서 말하지 않았나. 불행의 연속이 될 사건을 미리 막으려고. 과도한 기대는 사람을 무너트린다는 것 정도는 잘 알 텐데."
마이너스 100점. 내가 원하는 답이 그게 아닌 거 잘 알잖아.
"조금 봐 주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머리가 안 돌아가."
떨어진 핏방울은 어느 새 의자 밑에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이쯤 되면 실혈로 인한 최후가 이 처형의 막바지보다 먼저 다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몇 안 남은 힘을 끌어모아 자세를 바로 한다. 수반되어야 할 통증은 저물어 간다. 신경마저 파업을 시작하였기에.
"그러니, 질문을 명확하게 해 주면 안 되겠나... 약한 소리 해서 미안하네만, 약한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잖나."
그래... 확실하게 묻지. 왜 말하지 않았어? 진정으로 도움을 청했으면, 다른 방식을 찾아 볼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의 입이란 게 얼마나 가벼운지 알면서 이러는군. ... 아니야, 이것마저도 핑계겠지. ... 그래, 상호 이해할 수 없으므로. 스물 하나의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않나."
재판정에서 아무리 떠들든, 그리 떠들고 나서 처형이 이 단계까지 무르익던. 하류 아라타의 내심마저 기꺼이 이해하려 들 사람이 스물 중 몇 명이 있으랴. 살인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했어도 본인을 제외한 스물 중 몇 명이 받아들였을까.
"나는, 제법 신중한 사람이야. 이 일을 벌이기 전에 재능인의 협력을 얻어 본다는 간단한 계산도 아니 했을 것 같은가?"
계산하고 생각해서 그렇게 답이 나온 거라면... 더 할 말은 없을 것 같네.
그럼, 바이바이.
원점
그리고 작별인사가 끝나면, 보이는 것들은 다시 수많은 눈동자. 지금껏 네가 걸어 도착한 곳은 처음, 그 상황 그 곳이로다. 고하듯 눈동자들은 가만 하류 아라타를 바라본다.
복기를 마친 소감은 어떤가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용하군... 그리고 참 많은 착각을 했어. 이러고도 어떻게 진행된 게 신기할 지경으로."
이제라도 하는 후회는?
"없네.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어."
반성의 기미는 없군요.
"하하, 하. 웃기는 말을 하는군. 이제 와 반성한다고 먹히기나 하겠나."
암흑이 덮치고 썰물처럼 지나가면 지금껏 본 것은 허상이었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겪은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몸에 아로새겨져 있음에도. 도깨비에게 하룻밤 놀아난 것처럼 몽롱한 느낌에, 작게 웃는다. 피가 폐에 들어 차, 웃음이 기침으로 바뀔 때까지.
그럼, 지금까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본 세계는 무슨 판단을 할 것 같나요?
"모르겠군. 나의 클론이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었나? 판단은, 타인에게 떠넘기겠네. 정확하게 자신들이 이해한 대로 판단하겠지."
본디 판단만큼은 본인의 몫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하나의 사실이 그것. 남의 손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본인의 몫이었던 것. 오히려 그렇게 묻는 것이, 판단을 어느 정도 강제하게끔 하는 사실이라고 하류 아라타는 생각한다.
그 생각이 흐르는 피에 씻겨나갈 때 쯔음, 겨우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간다.
"...... 왜, 혹시 더 준비한 게 남았나?"
물론이죠. 5주 동안 던진 죄인의 질문에 대한 세계의 대답이 남아 있답니다.
슬슬, 마이크가 연결될 때가 됐는데...
반응에 놀라지 마세요? 그럴 만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인식하고 있겠지만!
어디에 묻혀 있는지 모를 스피커에서 잠시간 하울링이 퍼져나온다. 그리고 방을 가득 메우는 원망의 목소리, 절망의 목소리. 고막이 터지기 직전까지 그 비난, 비방, 욕설. 소리는 점점 커진다.
"처형장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울려대는군..."
그런 말을 하며 하류 아라타는 고개를 젓는다. 겨우, 겨우 쓰러지지 않을 만큼 다리에 힘을 주고는 앞을 바라본다. 그것은 하나의 오기. 지금까지 물어 왔던 질문의 답이 겨우 그 정도의 이유 때문에 재능인을 소모시키다니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이라면. 그런 오기 정도는 바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말로 조금씩, 좁아지는 방 안에서 하류 아라타는 그렇게 가만 서 있는다.
밀려들어오는 벽에 짓눌려 피 한 방울 남지 않을 때까지.
'裏面境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1,211 seconds (0) | 2023.03.07 |
---|---|
stay (0) | 2023.02.02 |
20 (0) | 2023.01.31 |